
※ 이 글에는 영화 《말아톤》의 주요 내용과 결말에 관한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42.195km.
마라톤 풀코스의 거리는 누구에게나 같다. 출발선에서 결승선까지 숫자로만 보면 아주 명확하다.
하지만 영화 《말아톤》에서 초원이 넘어야 하는 거리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는 거리, 자신을 걱정하는 가족의 판단에서 한 걸음 떨어져 스스로 선택해야 하는 거리, 그리고 누군가에게 보호받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의사를 가진 한 사람으로 받아들여지기까지의 거리가 함께 존재한다.
그래서 이번에는 《말아톤》을 흔히 이야기하는 ‘장애를 이겨내고 마라톤에 도전한 감동적인 이야기’로만 보고 싶지 않았다.
내게 더 오래 남은 것은 다른 질문이었다.
엄마일까, 코치일까, 아니면 결국 초원 자신이어야 할까.
출발선|엄마가 먼저 발견한 초원의 가능성
초원의 엄마 경숙은 누구보다 아들을 오래 지켜본 사람이다.
초원이 얼룩말과 초코파이를 좋아한다는 것도 알고 있고, 다른 사람과 의사소통할 때 어떤 어려움을 겪는지도 안다. 그리고 아들이 달리기를 좋아하며 뛰어난 지구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가장 먼저 발견한다.
그 발견은 초원의 인생에서 분명 중요한 시작점이었다.
만약 경숙이 아들의 능력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초원이 마라톤이라는 세계를 만날 기회 자체가 없었을 수도 있다.
여기까지만 보면 엄마의 선택은 당연히 좋은 방향으로 보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영화는 조금 더 복잡한 장면을 보여준다.
초원이 달리는 것을 좋아한다는 사실과 엄마가 초원을 훌륭한 마라토너로 만들고 싶어 하는 마음이 언제나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경숙은 아들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 하지만 사랑이 크다고 해서 상대가 원하는 것을 언제나 정확히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가장 가까운 사람이기 때문에 “나는 이 사람을 누구보다 잘 안다”는 확신이 생길 수도 있다.
그 순간부터 보호와 대신 결정하는 행동의 경계가 조금씩 흐려진다.
10km|잘하는 것과 원하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니었다
우리는 누군가가 어떤 일을 잘하면 자연스럽게 그 일을 계속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공부를 잘하는 학생에게는 좋은 대학을 기대하고, 운동을 잘하는 아이에게는 선수가 되는 미래를 상상한다.
능력은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쉽다.
하지만 그 사람이 정말 무엇을 원하는지는 훨씬 알아보기 어렵다.
《말아톤》에서 초원이 달리기에 재능이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재능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의 인생 목표까지 자동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이 부분이 이 영화에서 생각보다 중요하다고 본다.
“잘하니까 해야 한다”와 “좋아하니까 하고 싶다”는 비슷하게 들리지만 전혀 다른 문장이다.
첫 번째 문장에서는 다른 사람이 능력을 평가한다.
두 번째 문장에서는 당사자가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다.
초원을 바라볼 때도 이 둘을 구분해야 한다.
그가 남들보다 빠르게 달릴 수 있기 때문에 마라톤을 해야 하는 것인지, 달리는 순간 자체를 좋아하기 때문에 계속 뛰고 싶은 것인지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리고 바로 그 과정에서 코치 정욱의 역할이 들어온다.
중간지점|코치는 기록보다 초원의 반응을 보기 시작한다
처음부터 정욱이 초원을 특별하게 이해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훈련 과정에서 부딪히고 예상하지 못한 행동을 경험하면서 조금씩 그를 알아간다.
이 관계가 흥미로운 이유는 정욱이 초원의 인생을 처음부터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엄마와 달리 두 사람 사이에는 오랜 시간이 없다.
그래서 정욱은 초원이 실제로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보면서 관계를 만들어야 한다.
때로는 가까운 사람이 모르는 것을 처음 만난 사람이 발견하는 경우가 있다.
오래 알아서 생기는 이해가 있는 반면, 오래 알았기 때문에 너무 익숙해져 보지 못하는 부분도 있기 때문이다.
초원의 행동을 무조건 교정해야 할 문제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가는 과정에서 두 사람의 관계도 달라진다.
그렇게 보면 마라톤 훈련은 단순히 체력을 높이는 시간이 아니다.
주변 사람들이 초원을 ‘훈련시켜야 할 대상’이 아니라 하나의 의사를 가진 사람으로 이해해 가는 시간이기도 하다.
30km|사랑한다는 이유로 대신 선택해도 될까
이 영화에서 가장 어렵게 느껴지는 사람은 오히려 경숙이었다.
아들을 사랑하지 않아서 문제가 생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너무 사랑하고 너무 걱정하기 때문에 아들의 미래를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부모 입장에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이다.
실패할 가능성이 보이는데 그냥 지켜보는 것은 쉽지 않다.
다칠 것 같으면 말리고 싶고, 더 좋은 길이 보이면 그 방향으로 데려가고 싶어진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어려운 문제가 생긴다.
위험을 알려주는 것과 선택 자체를 대신하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니다.
누군가를 보호한다는 이유로 모든 결정을 대신하기 시작하면 보호받는 사람은 실패할 기회뿐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선택할 기회까지 함께 잃을 수 있다.
실패하지 않게 만드는 것이 언제나 그 사람을 위한 최선은 아닐 수도 있다.
사람은 자신의 선택으로 실패하면서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알아가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초원의 마라톤은 기록 경쟁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누군가가 정해준 목표를 수행하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달리고 싶어서 달리는 것인지가 중요해진다.
35km|초원을 ‘극복의 상징’으로만 보면 놓치는 것
《말아톤》은 흔히 감동적인 인간승리 영화로 기억되곤 한다.
하지만 나는 ‘장애를 극복했다’는 문장 하나로 이 영화를 정리하는 데에는 조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초원이 마라톤을 완주한다고 해서 자폐성 장애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완주가 초원을 다른 사람이 되게 만드는 것도 아니다.
달리기 전의 초원과 달린 후의 초원 모두 같은 사람이다.
달라지는 것은 주변 사람들이 그를 바라보는 방식에 더 가깝다.
처음에는 도움을 받아야 하는 사람, 보호해야 하는 사람,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다른 사람이 판단해야 하는 사람으로 보는 시선이 강하다.
하지만 초원이 자신의 방식으로 달리고 선택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를 바라보던 사람들의 판단도 조금씩 바뀐다.
그래서 이 영화가 보여주는 변화는 초원이 ‘평범한 사람’이 되는 과정이라기보다 주변 사람들이 초원을 더 온전한 한 사람으로 바라보게 되는 과정으로 보는 편이 더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40km|완주 직전 더 중요해진 것은 기록이 아니었다
마라톤은 이상한 운동이다.
출발할 때는 수많은 사람이 함께 있지만 거리가 길어질수록 결국 자기 몸과 자신의 판단을 믿어야 하는 순간이 온다.
다른 사람이 옆에서 응원할 수는 있어도 대신 뛰어줄 수는 없다.
바로 그 점에서 마라톤은 초원의 이야기와 잘 맞는다.
경숙은 아들을 도울 수 있다.
정욱은 훈련 방법을 알려줄 수 있다.
주변 사람은 응원할 수 있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발을 움직일 사람은 결국 초원이다.
그 사실이 분명해지는 순간부터 마라톤 완주의 의미도 달라진다.
몇 시간 안에 들어왔는지가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계속 달리고 싶은지를 스스로 결정했다는 사실이 앞에 놓인다.
기록은 다른 사람과 비교할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의 선택은 기록표에 남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결과가 숫자로 표시되는 완주 기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42.195km|결승선보다 먼저 넘어야 했던 것
초원이 결승선을 향해 달리는 모습은 분명 감동적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장면에서 다른 것이 보였다.
초원이 넘어야 했던 가장 큰 장벽은 육체적인 거리만이 아니었다.
“이 아이는 이것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아이는 이것을 하면 위험할 것이다.”
“이 아이에게는 이것이 가장 좋은 선택일 것이다.”
그동안 다른 사람들이 초원을 대신해 만들어놓았던 수많은 문장도 함께 넘어야 했다.
그 문장들은 대부분 악의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걱정과 사랑, 보호하고 싶은 마음에서 나온 경우가 많다.
그래서 오히려 더 어렵다.
나쁜 의도라면 거절하기 쉽지만 사랑에서 나온 결정은 거절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나는 그래서 《말아톤》을 부모의 헌신이나 한 청년의 인간승리만으로 기억하고 싶지는 않다.
누군가를 돕는다는 것이 그 사람의 삶을 대신 선택하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도 이 영화 안에 있다고 본다.
좋은 보호자는 모든 길을 대신 정해주는 사람이 아니라, 위험을 알려주면서도 상대가 자신의 길을 선택할 공간을 남겨주는 사람에 더 가까울 것이다.
초원의 42.195km는 단순히 마라톤 코스를 완주한 거리가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이 정한 가능성에서 벗어나 자신의 선택을 보여주기까지 달려온 거리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 내가 가장 오래 기억하고 싶은 것은 결승선을 통과한 순간보다, 초원이 자신의 발로 계속 달리기로 결정한 순간이다.
이 생각을 다른 영화와 이어본다면
사람의 미래를 다른 사람이 먼저 결정하기 시작한다면
《말아톤》에서 주변의 기대와 판단이 초원의 선택에 영향을 준다면, 《관상》에서는 사람의 얼굴만 보고 성격과 미래를 미리 판단하는 문제가 등장한다. 두 작품의 장르는 전혀 다르지만, 결국 한 사람에게 자신의 행동으로 평가받을 기회를 남겨두는 것이 왜 중요한지를 함께 생각해 볼 수 있다.
가족을 위한 책임은 어디까지 한 사람의 삶을 결정해도 될까
《말아톤》의 경숙이 아들의 미래를 책임져야 한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국제시장》의 덕수는 어린 시절부터 가족 전체를 책임져야 한다는 약속을 자신의 삶보다 앞에 둔다. 두 영화를 함께 보면 가족을 위한다는 마음이 사랑과 책임이 될 때와 개인의 선택을 뒤로 미루게 할 때의 차이를 비교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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