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뷰 및 감상평

영화 완득이|“똥주 좀 죽여주세요” 빌던 문제아, 결국 그 선생이 가장 먼저 자기 편이 됐다

valtstory 2026. 11. 6. 21:08

 

※ 이 글에는 영화 《완득이》의 주요 내용과 결말에 관한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 우리는 생각보다 빨리 그 사람을 설명할 단어를 찾는다.

공부를 못하는 학생, 싸움을 잘하는 아이, 가난한 집의 아들, 말수가 적은 문제아.

몇 가지 특징만 알고 나면 그 사람이 앞으로 어떤 행동을 할지까지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영화 《완득이》의 도완득도 처음부터 수많은 이름표를 달고 등장한다.

학교에서는 공부에 관심 없는 학생이고, 싸움에서는 쉽게 물러서지 않으며, 집안 형편도 넉넉하지 않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앞으로 특별히 기대할 것이 없는 학생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런 완득이 인생에 가장 귀찮은 사람이 한 명 있다.

담임교사 이동주다.

완득은 교회에 찾아가 “똥주 좀 죽여주세요”라고 빌 정도로 그를 싫어한다.

그런데 영화를 끝까지 따라가 보면 조금 이상한 관계가 만들어진다.

완득이 가장 사라졌으면 했던 사람이 오히려 다른 누구보다 오래 완득이 삶에 남아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한 가지가 달라진다.

동주는 완득을 좋은 학생으로 만들려고 하기 전에, 다른 사람들이 붙여놓은 이름표만으로 완득을 설명하지 않으려 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완득이》를 단순한 사제 관계나 성장영화로 보기보다, 한 사람에게 붙었던 이름표가 어떻게 하나씩 벗겨지는지를 따라가 보고 싶다.

첫 번째 이름표|‘문제아’라고 부르면 그 아이를 다 설명한 것처럼 보인다

완득은 학교에서 모범생과는 거리가 멀다.

성적이 뛰어난 것도 아니고, 학교생활에 적극적인 학생도 아니다. 자신을 건드리는 사람에게 쉽게 물러서지 않는 성격 때문에 주변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학생으로 보기도 쉽다.

그런데 ‘문제아’라는 말에는 이상한 편리함이 있다.

그 학생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를 더 이상 알아볼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수업에 집중하지 않으면 의지가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싸움을 하면 성격이 거칠다고 판단하고, 말을 하지 않으면 반항한다고 해석하면 된다.

하지만 행동에는 그 행동이 나오기까지의 시간이 있다.

완득 역시 학교에서 보이는 모습 하나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다.

집에 돌아가면 아버지와 삼촌이 있고,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은 현실도 있다. 자신이 다른 학생과 조금 다른 환경에서 살아간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쉽게 꺼내고 싶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완득의 거친 태도를 단순히 고쳐야 할 성격이라고 보기보다, 다른 사람이 쉽게 들어오지 못하도록 만들어놓은 벽처럼 느꼈다.

문제는 그 벽을 보고 대부분의 사람이 멈춘다는 것이다.

동주는 멈추지 않는다.

두 번째 이름표|동주의 오지랖은 분명 불편하다

그렇다고 동주를 완벽한 선생님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그는 학생의 사생활에 거침없이 들어오고, 완득이 공개하고 싶지 않은 가족 이야기를 건드리기도 한다.

현실에서 교사가 학생의 개인적인 영역에 같은 방식으로 개입한다면 당연히 조심해야 할 부분이 많다.

그래서 동주의 행동을 모두 “학생을 사랑했기 때문에 괜찮다”라고 정리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그의 오지랖이 특별한 이유는 한 가지 있다.

관심이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누군가를 걱정한다고 말하는 것은 쉽다.

하지만 실제로 계속 찾아가고, 상대가 밀어내는데도 상황을 살펴보고, 필요할 때 옆에 있는 것은 훨씬 번거로운 일이다.

동주는 완득의 인생을 대신 살아주지는 않는다.

다만 완득이 혼자서는 쉽게 만나지 못했을 사람과 연결될 기회를 만들고, 새로운 선택을 해볼 수 있는 방향을 계속 보여준다.

그래서 완득에게 동주는 처음에는 경계를 침범하는 가장 귀찮은 어른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는 몇 안 되는 어른 중 한 명이 된다.

세 번째 이름표|‘불쌍한 아이’라는 시선도 사람을 작게 만들 수 있다

완득의 가족 이야기를 알고 나면 또 다른 이름표를 붙이기 쉽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환경에서 살고 있고, 아버지는 장애를 가지고 있으며, 오랫동안 떨어져 지낸 어머니의 존재도 뒤늦게 알게 된다.

이런 요소만 모아놓으면 완득을 쉽게 ‘불쌍한 학생’으로 설명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영화는 완득을 계속 불쌍한 사람으로만 바라보지는 않는다.

완득은 화를 내기도 하고, 누군가를 좋아하기도 하고, 자신의 가족 때문에 창피함을 느끼기도 하며, 자신에게 맞는 일을 조금씩 찾아간다.

즉 완득에게 어려운 환경은 분명 존재하지만 그것이 완득이라는 사람 전체가 되지는 않는다.

나는 이 지점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누군가를 무시하는 시선만 편견은 아니다.

지나치게 불쌍하게 바라보는 시선 역시 그 사람을 하나의 모습으로 고정할 수 있다.

“저 사람은 이런 환경이니까 당연히 힘들 것이다.”

“저런 조건에서는 이런 선택밖에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판단 역시 결국 상대가 자신의 행동으로 다른 모습을 보여줄 공간을 줄여버린다.

완득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학생이지만, 동시에 웃고 화내고 사랑하고 운동하고 자신의 미래를 고민하는 평범한 청년이기도 하다.

네 번째 이름표|엄마를 만난다고 곧바로 가족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완득에게 어머니의 존재는 처음부터 따뜻한 기억으로 남아 있지 않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사람이 어느 날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난다고 해서 바로 가까워질 수는 없다.

혈연은 설명할 수 있어도 감정은 그렇게 빠르게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완득은 어머니를 마주하면서 자신이 몰랐던 가족의 일부를 처음 알게 된다.

그리고 이 과정은 완득에게 새로운 정보를 알려주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이 어떤 시간을 살아왔는지를 조금씩 이해하게 만든다.

특히 영화가 다문화가정을 바라보는 방식에서도 생각할 부분이 있다.

어머니의 출신 국가가 그녀의 모든 성격을 설명하는 것도 아니고, 완득의 가족이 일반적인 가족과 조금 다른 구성이라는 사실이 그 가족의 가치를 결정하지도 않는다.

가족의 모습이 다르다는 사실과 가족이 부족하다는 평가는 전혀 다른 문제다.

완득이 성장하면서 달라지는 것도 가족을 완벽하게 만드는 일이 아니다.

자신에게 이미 존재했던 사람들을 조금 다른 눈으로 보기 시작하는 것이다.

다섯 번째 이름표|복싱은 완득을 갑자기 다른 사람으로 만들지 않았다

성장영화에서는 주인공에게 특별한 목표가 생기는 순간이 자주 등장한다.

그래서 완득이 운동을 시작하는 과정 역시 흔히 ‘꿈을 찾았다’는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조금 다르게 보고 싶다.

복싱을 시작했다고 완득의 모든 문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가족 관계가 하루아침에 단순해지는 것도 아니고, 경제적인 현실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며, 갑자기 성격 좋은 모범생이 되는 것도 아니다.

다만 하나가 달라진다.

지금까지 완득의 힘은 주로 누군가에게 반응하는 방식으로 사용됐다.

화가 나면 싸우고, 자신을 건드리면 맞서고, 불편하면 거리를 두었다.

복싱은 같은 힘을 다른 방식으로 사용하게 만든다.

규칙이 있고, 연습이 필요하며, 자신의 움직임을 스스로 조절해야 한다.

그래서 복싱은 완득을 ‘문제아에서 훌륭한 학생으로 바꿔주는 장치’라기보다 완득이 가지고 있던 에너지를 자신이 선택한 방향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공간에 가깝다.

마지막에 남은 이름|그냥 ‘완득이’라고 부를 수 있을 때

영화 초반의 완득을 설명하는 단어는 많다.

문제아, 가난한 학생, 싸움을 잘하는 아이, 장애가 있는 아버지의 아들, 다문화가정의 자녀.

각각의 설명은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문제는 그중 하나가 완득 전체를 대표하기 시작할 때다.

사람은 자신이 처한 환경보다 복잡하고, 다른 사람이 처음 본 행동보다 훨씬 많은 면을 가지고 있다.

동주가 완득에게 해준 가장 중요한 일도 완벽한 인생의 답을 알려준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너는 원래 이런 아이야”라고 결론 내리지 않은 것에 더 가깝다.

완득이 밀어내면 다시 말을 걸고, 새로운 가능성이 보이면 한번 해보라고 연결해 주고, 가족 문제를 피하고 싶어 할 때도 완전히 외면하도록 두지 않는다.

그 방식은 분명 거칠고 때로는 지나치다.

하지만 완득을 불쌍한 학생이나 골치 아픈 문제아로만 보지 않았다는 점은 분명하다.

《완득이》를 보고 남은 생각

사람을 바꾸는 것이 언제나 대단한 조언인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때로는 다른 사람들이 이미 끝났다고 생각한 사람에게 계속 말을 걸고, 아직 선택할 것이 남아 있다고 알려주는 한 사람이 더 큰 영향을 줄 수 있다.

완득에게 동주는 처음에는 가장 사라졌으면 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결국 완득을 하나의 이름표가 아니라 ‘완득이’라는 한 사람으로 계속 바라본 어른이기도 했다.

그래서 제목에 있는 반전도 단순히 두 사람이 친해졌다는 뜻만은 아니다.

완득이 가장 싫어했던 선생님이 가장 먼저 자기편이 되었다기보다, 어쩌면 처음부터 완득의 편에 서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귀찮게 따라다녔던 것인지도 모른다.

좋은 어른이 모든 답을 대신 알려줄 필요는 없다.

다만 한 사람의 현재 모습만 보고 그의 다음 장면까지 미리 결정하지 않는 것.

《완득이》는 그 작은 차이가 사람에게 얼마나 큰 공간을 만들어줄 수 있는지 보여주는 영화였다.


이 주제를 다른 영화와 이어서 본다면

첫인상만으로 사람의 가능성까지 판단한다면

《완득이》에서 ‘문제아’라는 이름표가 완득의 다른 모습을 가린다면, 《관상》에서는 얼굴을 통해 사람의 성격과 미래까지 미리 판단하려 한다. 시대와 장르는 전혀 다르지만, 누군가를 먼저 규정했을 때 그 사람에게 남는 선택의 공간이 얼마나 줄어드는지를 함께 생각해 볼 수 있다.

→ 영화 《관상》|얼굴만 보고 사람을 미리 판단했을 때, 가장 먼저 사라진 건 선택이었다

사람은 그대로인데 주변의 평가만 달라진다면

《완득이》가 가정환경과 행동 때문에 한 사람에게 붙는 사회적 이름표를 보여준다면, 《미녀는 괴로워》는 외모가 달라졌다는 이유만으로 같은 능력을 가진 사람이 전혀 다른 평가를 받는 상황을 보여준다. 두 영화를 함께 보면 사람의 실제 가치보다 먼저 작동하는 사회의 평가 기준을 비교해 볼 수 있다.

→ 영화 《미녀는 괴로워》|95kg일 땐 목소리만 빌렸는데, 얼굴이 바뀌자 스타가 됐다